신대철 씨가 대장 까는 건 이해해도 다른 이들이 까는 건 못 참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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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서빠인지라 대장 까는 얘기 못 참는데, 그래도 신대철 씨 발언은 인정합니다.
왜냐면 신대철 씨는 대장의 음악적 스승이기 때문이죠.
비록 시나위 앨범에 실린 '은퇴 선언'이 대장 까는 거라 해서 당시 팔로 중에 시나위 시디 뽀개서 보낸 사람도 있었을 정도고, 저도 일기장에 신대철 씨 비판글 쓸 정도로 첨엔 신대철 씨를 싫어했지만, 지금은 이해해요.
그리고 그쪽은 대장을 인정하면서 까는 거니까요. 여담이지만, 당시 보컬이었던 김바다 씨도 최근 인터뷰에서는 대장의 음악을 종종 좋게 언급했더군요.
신대철 씨가 주로 깐 것은 이른 은퇴 선언이나, TV 무대에서 핸드싱크한 것 등, 음악인으로서의 태도 문제인 것이지 작품 자체에 대해선 함부로 까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장을 음악인으로서 존중한다는 걸 알 수 있죠. 대장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까는 평론가들이랑 다릅니다.
그런 점에서 1998년 계간지 <리뷰>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다만, 여기서 신대철 씨가 말하는 대장은 10대 시절 대장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보셔야 합니다.
당시엔 대장도 어렸기 때문에 고전 음악보다는 새로운 장르에 심취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도 나중에 서태지 심포니를 한 것을 보면, 신대철 씨의 가르침을 잘 새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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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시나위시절 태지 (98/12) 1999-09-12 20:30 233 line
98년 12월호 리뷰에 나온 신대철 인터뷰입니다.
시나위시절의 태지의 음악적 성향에 대해서 신대철씨가 비교적 자세히 인터뷰를 했습니다.
미디음악을 첨 태지에게 소개한 사람도 신대철이었군요.
시나위시절에 이미 태지가 습작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나위4집과 성격이 맞지않아서 채택되지 못했다는 얘기도...
전체맴버에 대해 나오는데요, 다 잘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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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 시나위를 거쳐간 멤버들 얘기 좀 해주세요. 특히 90년대 대중음악계에서 시나위 출신의 세 뮤지션, 서태지, 강기영, 김종서씨의 역활은 중요했다고 보이는데요.
신대철: 강기영씨는 처음부터 나름대로의 확고한 음악관이 있었어요. 베이스 기타를 굉장히 잘 쳤고 굉장한 테크니션이었어요 .
스머프라는 그룹에서 활동하던 당시 처음 보았는데 그때 베이스를잘 쳐서 눈에 들어왔어요.
나중에 같은 그룹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여러 곡을 연습하면서 저와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을 되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블루스나 70년대 하드록 같은 스타일은 강기영이 좋아하지 않았고 또 강기영이 좋아했던 아트록 계열은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김호경: 강기영씨가 아트록을 좋아했다고요? H2O나 삐삐밴드가 추구했던 펑크록과는 정반대 음악이었네요.
신대철: 당시 한국에 펑크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음악이었죠.
그렇지만 당시 시나위에서는 섹스 피스톨즈나 크래시 같은 펑크에 대한 얘기가 오가기도 했어요.
강기영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는 러시나 예스 같은 예술적인 취향의 음악들을 좋아했었고 연습할 때도 고난이도의 어려운 곡을 요구하는 등테크닉적인 면을 많이 요구했었어요.
아마 펑크 음악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소개한 것은 제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그때 저는 섹스피스톨스나 크래시, 런던 콜링의 음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펑크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이런 것도 있다는 의미에서 관심은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것도 있는데 너는 왜 그렇게 어려운 것만 하려고 그러느냐고 소개해준 거죠.
원래는 시나위 결성 초기의 멤버였는데 1집 곡 만드는 과정에서 음악적인 견해 차이로 탈퇴했다가 2집 때 다시 합류해서 활동했었죠.
김호경: 펑크를 소개한 것은 신대철이였는데 결국 펑크를 하게 된 것은 강기영씨였군요.
김종서씨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2집의 경우, 김종서씨의 취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신대철: 김종서씨가 원래 좋아했던 음악은 비틀즈나 레드 제플린 스타일이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취향이 일치했지만 그는 좀 라이트한 스타일을 저는 좀더 강력한 하드록을 좋아했지요.
그러나 큰 충돌은 없었어요.
그때는 제가 거의 독단적으로 음악을 만들었으니까 제 취향대로 만들었던 게 많았던 것 같아요.
2집 앨범만 하더라도 단순한 하드록을 추구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음반을 LA메탈이라 규정지으려는 시도들이
무리라고 생각해요.
물론 아주 영향받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우리는 LA메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우리는 브리티시 정통 록을 추구했거든요.
남들이 그렇게 불러줬지 우리가 그런 것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어요.
김호경: 당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신대철-김종서 진영이 불멸의 콤비로 불리어졌었는데요.
신대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결국 3집 앨범 작업하면서 부딪치더라구요.
어찌 되었건 김종서씨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보완하려고 열심히 했던 노력파였던 것은 분명해요.
2집 앨범 녹음 과정에서도 음정불안이 문제가 됐지만 필링만 제대로 살면 된다는 선에서 타협을 보고 녹음에 들어갔었고, 그래도 그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압도할 수 있는 소질을 타고났어요.
김호경:서태지 얘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시나위란 그룹의 특이한 점 중 하나가 지명도에 비해 과감한 신인기용을 한다는 점인데요.
현재의 멤버인 김바다-신동현-김경원도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사람들을 정규 멤버로 기용하셨는데 그 점은 서태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결단을 하셨는지?
신대철: 과감할 것도 없어요. 제가 볼때는 전혀 재능이 없고 여기가 체질상 안 맞는 애다 싶지 않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전 아주 어렸을때부터 이 판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제 주위에 몰렸거든요 그래서 딱 보면 잘하는사람, 못하는 사람을 구분해 낼 수 있어요.
전 멤버를 기용할 때 오디션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보면 알아요. 눈빛만 보면 알죠.
록음악을 잘하려면 반항끼를 타고나야 하거든요.
금기에 도전하고 범죄도 저질러볼 만큼의 배짱이 있어야죠.
시각의 확장을 통해 사물의 이면을 볼 수 있어야 예술가라고 할 수 있지요.
김호경: 눈빛만 보고 멤버를 기용하셨다고요? 어떻게 오디션도 안 보고 대 시나위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하셨죠?
신대철: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저랑 같이 일하면 누구든지 잘할 수 있어요.
연습하면서 제가 그 사람의 장점을 발견시켜주죠, 시나위의 연주는 굉장히 자유로운 면이 있거든요.
꽉 짜여진 것보다 흘러가는 듯하면서 맞아 들어가는 그런 분위기를 제가 좋아하기 때문에 연습도 그런 분위기로 하고 잼을 많이 하죠.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이 잘하는 스타일을 발견시켜주는 거죠.
저는 알거든요. 특별히 얘가 잘하는 건 이거구나 하고
김호경: 그렇다면 그 사람의 장점에 맞춰서 음악스타일도 약간씩 변화하게 되겠네요.
신대철: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연히 맞춰주게 되는 편이에요.
김호경: 그런 의미에서 아버님 신중현씨가 60년대와 70년대 초, 스타제조기라는 명성을 휘날리시던 것과 비교될 수 있는데 사람을 보는 눈은 물려받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신대철: 아버지와 비교될 수는 없겠죠.
아버지는 스타를 만들어내신 분이고 저는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나가서 스타가 된 것일 분이니까.
김호경: 89년도에 발매되었던 신대철씨 독집앨범 <코로나>는 기타를 제외한 나머지 파트가 전부 컴퓨터로 제작되었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최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미디음악에 대한 신대철씨의 관심은 당시 같은 멤버였던 서태지에게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신대철: 제가 미디음악을 처음으로 접한것은 88년 경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미디 음악이 소멸되기 직전이었거든요.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미디기계들이 들어왔고 처음에는 그것이 새로운 음악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 당시 저는 그러한 미디음악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면 사람 대신 컴퓨터의 도움을 좀 받는것이라 생각했었고 그 이후로는 영화음악 만들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어요.
저는 거기에 새로이 관심을 가졌던 것뿐이고 그것을 새롭게 해석한 친구가 바로 서태지죠.
김호경: 그러면 어떤 직접적인 음악적 영향력의 교류가 있었나요?
신대철: 미디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저랑 같이 낙원상가에 가서 기계도 사고 그랬죠.
그때부터 혼자서 작업을 많이했고 저는 옆에서 녹음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죠.
그때부터 자기가 미디로 만든 거라고 데모도 만들어와서 들려주기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시나위의 성격과는 안 맞아서 4집 앨범에 서태지의 곡이 수록되지는 못했어요.
시나위 5집의 엔지니어링을 맡으셨던 김국현씨가 서태지 3집의 녹음을 도와주셨는데 미국에서 녹음하면서 얘기를 많이 했었나봐요.
사석에서 서태지가 저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얘기하더라고 말하더군요.
그 당시 저는 서태지를 저의 제자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음악적인 조언을 많이 했었죠.
김호경: 서태지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신대철: 이중산씨가 우드스탁에서 매일 공연을 하시고 그런 때였는데 밴드 멤버라고 베이스와 드럼의 꼬마 둘을 데리고 오셨더라구요.
보니까 뭐든 시키면 잘할 것 같았어요, 나이가 몇이냐고 물어보니까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대답하더라구요.
그런데 어떻게 머리가 그렇게 기냐고 물어보니까 학교 그만두었대요.
잘됐다고 생각해서 중산이 형한테 쟤 내가 데리고 있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보니까 그러라고 대답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같이 있게 된 거죠, 그런데 시나위 곡을 다 할줄 알더라구요.
특히 2집에 있는 곡은 이미 거의 혼자서 마스터를 했더라구요.
서태지는 처음 볼 때부터 언젠가는 굉장한 스타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스타로서의 자의식이나 기질이 유난히 돋보였거든요.
그리고 시나위에 오래 못 있고 나갈 거라는 느낌도 들었어요.
김호경: 그 당시 록음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교류하셨는지 궁금한데요.
신대철: 처음에 제가 서태지에게 했던 얘기는 밴드에서 베이스는 테크닉이 중요한 게 아니라 뿌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거다라는 말이었고 그리고 블루스를 연주할 수 있어야 진정한 록커가 되는 거다라는 것을 강조헀었죠.
김호경: 그러한 블루스적인 필링은 서태지의 감성과는 거리가 먼 듯 싶은데요.
그리고 시나위 시절부터 흑인음악을 들었다고 하던데...
신대철: 거리가 멀죠.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것을 알아야 진정한 록 밴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눈에 그런 것들을 강조했던 거고 제 생각에 서태지는 흑인음악을 흉내낸 게 아니라 가장 영향받은 것이 비스티보이스였다고 생각해요.
비스티 보이스에서 랩이라는 것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나중에 <교실이데아>에서 <필승>까지에 이르는 아이템들은 비스티 보이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죠. 그 당시 저는 비스티 보이스가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스타일이다 그렇게 생각했었지...
김호경: 그때부터 새로운 음악을 도입하고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서태지가 빨랐다는 얘기네요.
신대철: 그렇게 볼 수도 있죠.
저는 서태지 생일 선물로 레드 제플린 CD를 사준 적도 있으니까.
하하. 전혀 딴판이죠.
이건 록음악의 뿌리를 가르쳐주고자 여러가지 도움을 줬었지만 그게 잘 안 먹히더라구요.
처음 음악을 들은게 머틀리 크루, 스트라이퍼, 비스티 보이스에서 시작했으니 그 이전의 고전이라 할 만한 록음악을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그것을 통해 시각의 확장을 주려고 했었지만 그 친구가 갖고 있는 감각적인 면과 더불어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음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클래식까지 이해한다면 훌륭한 뮤지션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서태지는 그런 노력은 없었어요.
고전을 듣는다는 건 고역이라 생각했고 새로나온 사조를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데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어요.
그런 점이 결국 나중에 신세대적 감수성과 맞아서 그들을 대표하는 목소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김호경: 놀라운 것은 그 당시 서태지는 벌써 염색하고 파격적인 무대의상을 입어서 시나위 팬들조차도 너무 심한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는데.
신대철: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죠. 염색은 나도 하려고 그랬었는데. 하하.
그것은 하나의 패션이고 팬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니 그만큼 록팬들조차 보수적이었다는 얘기죠 .시나위 팀내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 건 절대적으로 개인의 취향 문제니까. 그런것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저는 서태지가 갖고 있는 감각적인 면이나 스타성은 높이 사요.
단지 뿌리가 든든했더라면 지금보다 자기의 스타일을 정립하고 진정한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거죠.
김호경: 결국 서태지를 위시로한 시나위 출신의 뮤지션들이 이후 90년대 대중음악의 감수성을 대변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맹아라고 할 수 있는 시나위의 행적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강기영씨도 "서태지나 내가 했던 일들은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시나위 시절에 우리가 생각해왔던 일들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바도 있고.
신대철: 당시 상황이 90년대 초반만 되었어도 상황은 달랐겠죠.
당시는 시대가 시대였으니만큼 단지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것으로 멈춘 것이고 서구에서는 10년 동안에 이루어질게 여기서는 3,4년안에 지나가버리니까, 80년대와 90년대, 심지어 90년대 초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잖아요.
그들이 90년대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를 좌지우지한 천재적 뮤지션이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어째서 그런 사람들이 시나위에 모이게 되었냐고요? 전생에 인연이겠죠 .
우리들 모두 50년대 비트족이었거든요. 하하. 농담입니다.
<참고>
비트족 (the beat generation)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에 걸쳐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 및 샌프란시스코의 노스비치에 등장한 일군의 작가, 시인들.
그들은 경쟁과 관리를 으뜸으로 하는 사회에 견디지 못해 방종한 생활과 행동으로 해방감을 얻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선(禪),마약, 재즈 등을 사용한 비트운동은 미국사회에 대한 항의와 그곳으로 부터의 이탈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이기도 했다.
문학표현으로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모더니즘의 억제와 질서지향에 반발하고 내재한 자아를 무제한으로 해방시키려고 했다.
W.휘트먼의 전통을 이어받고 프랑스 초현실 주의에 가깝다.
-동서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영화 '비트'도 비트 제너레이션에서 제목을 따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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뷁만년 전에 제가 태지존에 올렸던 글인데 떠돌고 떠돌아 쌈넷 게시판까지 왔군요.
이 기사는 국회도서관에서 계간지 '리뷰' 98년도 겨울호를 찾아보시면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제로프리 님의 댓글

신대철이 서태지의 연주 실력에 대해 칼박똥필이라고 했던 일화가 생각 나네요.. ㅋㅋ 시나위 때 사이가 안좋았네 어쨌네 심부름을 시켰느니 어쨌느니 탈퇴과정의 떠도는 말도 많았는데 초기 음악적 스승이고 영향도 많이 주셨고 서태지와 아이들 음반에도 참여해주신 고마운 분..
피터팬증후군님의 댓글

좋은글 감사.전 못봤던 글인데... 잘 읽었습니다.신대철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네요.
Neryong Ci님의 댓글

원래 loser들이 하는일이 그건데요 모...
Neryong Ci님의 댓글

인정하면서 까는건 쪼다들이하는거구요.. 인정안 할순없고.. 자신의 탈랜트로는 불가능하다는걸 그렇게 표현하는거예요..
야옹야옹이님의 댓글

잘읽었습니다~~ 흥미진진.. 몰랐던부분이 많네요 ^^감사해요
soshiah님의 댓글

6집시절 인터뷰에서 대철형님이 그정도 실력이면 세계무대로 진출하면 더 빅수받을 일이라며 인터뷰한게 생각나네요
only1태지~♥님의 댓글

길지만 정독했네요.신대철님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