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리뷰] 서태지 - 크리스말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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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원문 : http://blog.naver.com/gym7321/220153708359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정신의 발전단계를 낙타-사자-어린아이로 구분했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도덕적인 명령에 순종하는 존재(낙타)에서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는 존재(사자)로 현신하며, 마침내 모든 외부적 영향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놀이로 향유하는 주체(어린아이)가 된다. 이 과정은 서태지의 삶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평범한 고등학생(낙타)이었던 서태지는 한 때 제도권에서 이탈하여 주류질서를 전복시키는 저항의 아이콘(사자)으로 현신하였으나, 지금은 외부의 모든 가치평가를 넘어 자신만의 룰(어린아이)대로 편안히 세계와 관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심정의 변화는 음악에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8집 는 '어린아이' 서태지를 처음으로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하다. 다시 말해, 그 동안의 솔로앨범이 장르적 뼈대(예를 들어 얼터너티브, 뉴메탈, 이모코어)를 '미리 정해두고' 자신의 살을 붙여나가는 방식이었다면, 8집은 본인이 '흥미를 느끼는' 사운드 텍스쳐를 융합하여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지점'을 만들어내고 그 지점부터 서태지를 '발견'하게 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전매특허인 장르에 대한 개방성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은 8집에서 그의 재능을 만개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흥미에 따라 놀이의 법칙을 스스로 만들어내듯이 이질적인 장르의 텍스쳐를 과감하게 융합하고(모아이, 휴먼드림), 관습적인 곡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파괴하는(줄리엣, 버뮤다) 시도는 8집을 어떠한 장르적 컨벤션으로 묶어내기 힘든 '무언가'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음악적 개방성은 <크리스말로윈>에서 정점에 달한다. 레트로 신디사이저부터 그로울 베이스, 트랩과 현악 스트링 등 사운드 텍스쳐는 한 두번 청취로 완전히 포착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유능한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진 야생동물처럼 곡이 표현하는 정서(기괴함)를 극대화 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곡의 구조는 어디가 벌스고 어디가 사비인지 분간이 안될정도로 분절되어 있으며, 이 분절된 파트들은 저마다 강력한 훅(Hook)을 휘두르며 각자의 생명력을 발산한다. 사운드 텍스처가 만들어내는 (이제까지 본 적없는)기괴한 전경과, 리스너의 손을 잡고 이 전경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리듬은 4분이라는 시간동안 청취자를 현실이 아닌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이 '낯선 곳'은 우리의 관습과 신념이 철저하게 해체되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관습적인 영웅인 산타는 악의 화신이 되고, 축복의 성탄절은 착취와 공포의 계시가 된다. 서태지는 <크리스말로윈>을 통해 우리가 보편적/통속적으로 믿고 있는 가치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하고 불완전한 것인지 절묘한 역설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니체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이라는 저서에서 무언가를 '선'과 '악'이라고 규정짓는 (보편적/통속적)가치를 전면으로 거부하고, '나'라는 개별적인 존재가 내적인 자발성에 의해 획득하는 '좋음'과 '나쁨'을 신뢰하라고 강조했다. 쉽게 말해, 산타라는 존재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나의 내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외부세계의 보편적인 인식(산타가 자애로운 존재라는)에 나의 판단이 빚을 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인 자발성에 대한 강조는 후반부 랩파트에서 돌연 나타난다. 변칙적인 리듬 위에서 쉴새없이 펄럭이며 비아냥 되던 보컬은 트랩비트에 발목을 잡히며 차분히 가라않고 그 순간, 마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영웅이 등장한다. '나는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안락함의 노예이지만, 나에겐 달콤한 케익(나 자신에 대한 만족)이 있다, (산타를 비롯한)너네들이 보기에 보면 나는 불순한 스펙이지만 나는 전혀 상관 안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어서, 그동안 산타가 아이들에게 강압적으로 해왔던말인 'better not cry'를 오히려 산타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는('you better not cry') 여유까지 보인다. 트랩과 랩핑이라는 흥미로운 장르전환과 서사의 절정(영웅의 등장), 그리고 강력한 메세지가 합쳐지면서 청자로 하여금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우리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던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었고, 그 어느때보다 즐거운 태도로 흥미진진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음악이 신체활동의 부차적인 요소 정도로 취급되는 이 시대에 음악자체에 대한 진지한 담론을 이끌어낸다는 측면에서 서태지의 존재는 큰 의미가 있다. 이제 문화대통령이니 신비주의니 하는 꼬리표는 잠시 내려놓고 음악에 귀 기울이자. 누구와 비교 할 수 없는, 서태지 본연의 음악이 여기에 있다.
댓글목록
aledjdy0625님의 댓글

대박..
정말 멋집니다
묨개님의 댓글

...끄응 솔직히 이런 거 별로 입니다. 대장 음악은 절대 이런 과거의 이론적인 답습이 아닙니다. 이제야 대장이 성숙해보인다?...음악을 어느 정도 좋아하는 (그래서 신경쓰고 보는) 사람들은 어이가 없을 겁니다; 항상 자유가 보장된 음악을 추구하던 대장이 이런 평가를 보면 좀 힘이 빠질 것 같습니다.
쫀듸기님의 댓글

완전공감..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난건 그의 모든 가사가 말해주지요.